27일 오후 3시 일본 교토 도시샤대의 음악 강당 하디홀. 무대에 길이 2m 이상에 무게 100kg이 넘는 건반형 타악기 마림바 2대가 놓였다. 오른쪽 마림바 앞엔 다운증후군으로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체구를 가진 다다 슌스케(28)씨가 일본 전통 의상 하카마를 입고 섰다. 왼편엔 건장한 성인 남성 체구지만 발달장애로 지적 수준이 초등학생에 머물러 있는 유용연(27)씨가 섰다. 두 연주자 뒤엔 한국에서 온 발달장애인 관현악단 ‘하트하트 오케스트라’ 댄원 37명이 지휘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집시풍 무곡인 차르다시(Czardas)의 선율이 시작되자, 학예회의 유치원생처럼 딴짓하던 유씨가 돌변했다. 양손에 든 채가 건반 위를 흐르는 물처럼 지나며 감각적이고도 강한 타악기의 울림을 냈다. 이어 다다씨가 이어받아 감성적인 섬세한 기교를 얹었다. 바이올린, 첼로 등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타악기 리듬을 따라 연주했다.
일본인 발달장애 아동들과 부모 등 100여 명의 관객은 예상을 훨씬 넘는 프로급 연주에 숨을 죽였다. 나라현에서 온 노무라 다케오씨 부부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BTS와 같은 K팝만 알았는데, 그것보다 더 기억해야 할 한국 음악이 생겼다”고 했다. 노무라 부부도 발달장애인 자녀가 있다고 했다.
한일(韓日) 장애인 연주자들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도시샤대에서 만나 협연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원이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한국 하트하트오케스트라가 음악을 통한 한일 우호를 바라며 펼친 일본 투어 공연 중 하나다. 이번 투어는 25·26일 오사카, 27일 교토, 28일 나라에서 총 5차례 열렸다. 27일 도시샤대 공연은 윤동주 시비(詩碑) 헌화와 그의 시 ‘별 헤는 밤’ 연주가 있어 특별했다. 바리톤 김수한은 굵은 목소리로 “자랑스러운 풀이 무성할 거외다”라는 시구를 노래해 한일 관계에서 아픈 과거인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기렸다.
공연을 공동 주최한 도시샤대의 기하라 가쓰노부 부총장은 “발달장애인들은 자신의 관심사에는 혼자 잘 집중하지만, 남과 함께하는 건 매우 힘들다”며 “윤동주와 정지용의 모교인 도시샤대에서 불가능을 극복한 오케스트라를 만나, 존경과 감탄을 보낸다”고 말했다.
자폐를 앓은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데릭 패러비치니와 같은 세계적인 연주자도 적지 않지만, 발달장애인만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하트하트가 유일하다. 발달장애인에겐 타인의 소리를 듣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러시아 차이콥스키 음악원 지휘과 출신인 안두현 지휘자만 비장애인이다. 2006년 창단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는 예술의전당 정기 연주회와 뉴욕 카네기홀, 워싱턴 DC 케네디센터, 파리 살가보, 벨기에 왕립음악원 등에서 1300회 넘게 공연했다.
이날 협연 리허설에선 안 지휘자가 2~3차례 중간에 연주를 끊고 다다씨에게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8년간 마림바에 몰두해온 다다씨지만 다른 연주자나 오케스트라와 협연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본공연에선 딴판이었다. 유씨와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이 다다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협연이 끝나고 다다씨는 지휘자, 유씨와 악수했다. 한 번 악수하곤, 격한 감정에 다시 악수했고 또다시 세 번째 악수를 청하며 감사를 표했다.
하트하트 오케스트라의 일본 장애인 음악가에 대한 헌정 연주도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아들이자 발달장애 피아니스트인 오에 히카리가 작곡한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다. 60대인 오에 히카리는 건강이 안 좋아 이날 공연엔 참석하지 못했다. 오케스트라는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동요인 ‘고향’과 ‘고추잠자리’,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주제곡도 연주했다.
문화부 차관 출신인 오지철 하트하트 재단 회장은 “장애인들은 도움을 받는 존재인 동시에 우리들에게 음악이나 다른 재능으로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40대 일본 여성은 “자폐는 자신의 세상에 갇힌 사람들인 줄만 알았는데 편견이 깨졌다”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급증하는 일본에 좋은 메시지와 소리를 전해준, 한국의 모든 분께 감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