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하트재단, 시각장애아동 위한 학교 도서관 새단장 프로젝트
보조공학기·의료비 지원 한계 느껴… "아이들 역량 계발할 환경 만들어주자"
시각장애학교 대상 도서관 건립 시작… 북콘서트 등 책 즐길 방법 알리기도
"우와~ 앉아서 책 읽을 수 있는 방이네! 바닥이 엄청 폭신폭신해요."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보조 받침대가 생겼어요. 이제는 책 읽을 때 목이랑 허리가 안 아플 것 같아요!"
손으로 벽을 짚고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선생님 목소리를 따라 손끝으로 공간을 구석구석 탐색하길 30여분.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 얼굴이 발그레 상기됐다.
이곳은 지난 7일 서울 성북구 한빛맹학교에 새로 생긴 도서관이다. 점역(글자를 점자로 고침)과 녹음 공간으로 같이 사용하느라 좁고 답답했던 공간이 탁 트인 ‘책 놀이터‘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어두컴컴하던 조명은 환해졌고, 지저분하던 갈색 책상은 널찍한 사각 책상으로, 낡은 독서확대기는 탁상용 새것으로 바뀌었다.
한빛맹학교 관계자는 "점자 책은 일반 책에 비해 두께가 두껍고 길어서 일반 서가에 점자 책을 꽂기엔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번에 점자 책 규격에 맞는 서가로 변경했다"며 "새로 갖춘 독서확대기는 아이들 눈 상태에 맞춰 글자 크기와 색깔 등을 조절할 수 있어 활용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저시력 아이들의 경우 책을 가까이서 보느라 웅크린 채 눈에 책을 붙이다시피 해야 했다. 하지만 각도 조절 보조책상이 4개나 마련돼 이런 걱정을 덜었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건 ‘좌식 공간‘. 맹학교의 특성상 통학에 동행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이들에게도 편안한 독서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지윤(12·가명)양은 "일반 도서관에서만 갈 수 있던 편안한 방(좌식 독서 공간)이 학교에도 생겨서 행복하다"며 "꼭 엄마를 데리고 와서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을 만나는 소중한 창구, 책
한빛맹학교의 도서관을 새롭게 개조하는 데 팔을 걷어붙인 곳은 하트하트재단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 아동에게 책을 ‘읽게 하는‘ 도서관 사업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비장애인의 경우 정보의 90% 이상을 시각을 통해 얻는다. 시각장애인은 대부분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보 접근성이 무척 떨어진다. 일주일 단위 독서 비율을 비교해보면, 비장애인은 71.4%인 반면, 시각장애인은 28%다.
황경선 한빛맹학교 교감은 "학령기 아동들에게 독서는 지식과 정보 습득뿐 아니라 다양한 진로와 비전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작의 차원에서 시각장애 아동들이 마음껏 책 읽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열악하다. 전국 시각장애인 인구는 약 25만명(2014년 기준)이지만, 점자 도서관은 37곳뿐이다. 공공도서관 중 장애인 자료실이 설치된 비율은 10.9%(총 910곳 중 99곳)에 그쳤다. 시각장애학교 내 도서관도 점자 및 촉각 도서 같은 특수 도서의 비중이 적고, 자료의 분류나 목록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많다. 2006년 시각장애 아동들을 위해 독서확대기 등 보조공학기와 안질환을 가진 아동들의 의료비·장학금을 지원해온 하트하트재단의 고민이 커진 이유다.
김진아 하트하트재단 교육복지사업부장은 "2010년부터 보조공학기기를 지원받은 아동이 430명에 달하는데, 보조기기와 의료비 지원만으로는 이 아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 자립하는 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이들의 역량을 개발하고 꿈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2014년, 하트하트재단은 본격적으로 도서관 건립 사업에 뛰어들었다.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와 산학 협력을 맺고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도서관 구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를 담당한 이지연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시각장애인학교 도서관의 운영 환경을 파악하고, 도서관 상황에 맞는 솔루션과 효율적인 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시각장애학교의 반응은 뜨거웠다. 도서관 건립 학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자 전국 12개 맹학교 중 8개 학교가 지원을 신청했다. 특수 도서 확대, 독서확대기 등 보조기기 요청, 공간의 재구성 등 신청 이유도 다양했다.
◇도서관, 꿈이 자라는 곳으로 변신하다
가장 먼저 변신한 곳은 청주맹학교다. 약 4개월의 공사 끝에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이지연 교수는 "청주맹학교는 보유 도서 리스트 목록조차 없을만큼 도서관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고 회상했다. 한 차례 진단이 끝난 뒤에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도서관의 실 평수와 책장 높이 등의 측정이 이루어졌고, 학교 선생님들이 회의에 참여해 아이들의 동선과 특성을 공유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자원봉사자와 문헌정보학과 전공 학생들도 힘을 보탰다. 도서관 내 보유 도서 리스트를 작성하고, 분류 라벨을 붙였다. 데이터로 베이스를 구축하는 과정도 빼놓지 않았다.
청주맹학교에 이어 강원명진학교, 대전맹학교가 몸단장을 끝내고, 올해는 지난 2월 광주세광학교를 시작으로 한빛맹학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아이들을 맞았다. 김진아 부장은 "건축학, 디자인학, 사회복지학, 문헌정보학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과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다"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아이들이 사용할 때 도움이 될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번 한빛맹학교 도서관 완공식에는 11월 11일로 지정된 한국 ‘눈의 날‘을 기념하며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행사가 하나 더 마련됐다.
책과 음악을 동시에 ‘듣는‘ 북콘서트가 진행된 것. 권지연 하트하트재단 후원사업홍보부장은 "아이들에게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하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행사의 의미를 전했다. 이 날 정영희 시낭송가를 포함한 3명이 엘가, 하이든, 베토벤에 대한 위인전을 낭독하고 발달장애청소년으로 구성된 하트하트오케스트라가 해당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했다. 박한영(12·가명)양은 "저번에 "‘베토벤‘을 읽었는데 음악이랑 목소리랑 같이 들으니까 신기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하트하트재단은 올해부터 또 다른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면 이제는 도서관 안에서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을 함께 하겠다는 것. 7월부터 이지연 교수와 도서관 이용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부 시각장애학교에는 이미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광주세광학교는 중고등학생 40명을 대상으로 독서토론, 영화감상, 문학기행, 문학강연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한빛맹학교는 초등학생 21명이 참여해 책을 만드는 ‘글 그림 만지기‘ 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 부산맹학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시문집 만들기를 진행해 창작 시문 및 시화 작품집을 만들 예정이다.
장진아 하트하트재단 사무국장은 "시각장애아동을 위한 도서관 건립과 프로그램은 전국 시각장애학교를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며 "앞으로도 시각장애아동의 정보 격차를 해소하고, 아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쓰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