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현 지휘자(가운데)와 하트하트 오케스트라가 7일 프랑스 파리의 살가보 공연장에서 연주 시작에 앞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는 30여 명의 단원 전원이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부근 ‘살가보(Salle Gaveau)’는 1907년에 문 열어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작품이 초연된 유서 깊은 공연장이다. 파블로 카잘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한국의 조성진 등 세계적 음악가들이 연주했던 이 무대에 지난 7일 오후 한국에서 온 특별한 오케스트라가 올랐다. 연주자 36명 전원이 자폐·지적장애 등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다. 트롬본 연주자 전진(24)씨는 “프랑스에서 꼭 연주하고 싶었다. 소원을 이뤘다”고 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날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 서곡’, 카미유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연주했다. 체코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 및 9번의 4악장도 들려줬다. 2015년 롱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영국 피아니스트 줄리안 트리벨리안과 협연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도 연주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라고 믿을 수 없는 수준급 연주에 관객 1000여 명은 큰 박수를 보냈다. 한 외교관은 “장애가 없는 연주자들도 소화하기 어려운 레퍼토리에 놀랐다. 공연 그 자체로 감동적”이라고 했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프랑스 관객 앙투안 뤼카(41)씨는 “장애인 가족들에게 정말 큰 용기를 주는 연주였다.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날 파리 공연은 8일까지 열리는 2024 파리 패럴림픽 중 ‘문화 올림피아드’ 행사의 일환이다. 주(駐)프랑스 한국문화원이 현지 지원을 맡았다. 파리의 문화 예술계 인사와 각국 외교단,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이날 공연을 관람했다. 지난 4·5일엔 유럽연합(EU) 본부가 있어 ‘유럽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도 공연했다. 오케스트라 측은 “브뤼셀 공연엔 유럽연합 인사들이 참석해 ‘(장애인 인권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도 못한 일을 한국이 해낸 것이 놀랍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프랑스 청중을 위해 준비한 앙코르곡은 특히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첫 곡으로 프랑스 대표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을 연주했을 땐 첫 멜로디가 나오자마자 프랑스 관객들이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쳤다. 두 번째 앙코르곡은 프랑스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였다. 프랑스 관객들은 역시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났고 손뼉을 치며 즐겼다.
이 오케스트라는 2006년 사회복지법인 하트하트재단이 창단했다. 단원 대부분이 19년 동안 함께한 창단 멤버들이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장진아 대표는 “초등·중학생이던 단원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고 있다. 긴 세월에 걸친 지난한 연습과 노력이 지금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고 했다. 발달장애인들은 악기 연주를 위한 각종 기능을 배우는 데 서너 배의 노력이 들어간다. 일부 단원은 10년이 넘게 거의 매일같이 재단 연습실에 나와 연습을 한다. 연주자 전진씨 어머니는 “열두 살 즈음 시작해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나와 이 오케스트라가 진이를 함께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신인숙 재단 이사장은 “(사회성이 부족한) 발달장애인이 어떻게 오케스트라를 할 수 있느냐는 우려와 편견을 헤치고 이룬 성과”라며 “음악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고도 했다. 단원 중 상당수가 일반 대학에 입학해 음악을 전공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다. 오케스트라가 자칫 골방에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낼 뻔한 이들을 ‘무대’라는 사회로 이끌어내 비장애인과 당당히 경쟁하는 음악인이자 사회인으로 만들어낸 셈이다.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는 매년 예술의전당에서 정기 연주회를 열면서 미국 뉴욕 카네기홀, 워싱턴 케네디센터 및 로스앤젤레스·시카고와 일본 도쿄 등에서 해외 공연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총 연주 횟수가 1200회에 달한다. 처음 수년간은 비장애인 객원 연주자의 도움을 받았지만, 2016년부터는 발달장애인 단원들만의 힘으로 연주하고 있다. 8년여간 지휘를 맡아온 안두현 과천시향 상임지휘자는 “수많은 교향곡에 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어 왔고, 이는 (장애인 오케스트라로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생각한다. 연주를 거듭하면서 그 한계를 계속 깨가고 있다”고 했다.
오케스트라의 명성이 한국을 넘어 널리 알려지면서 홍콩·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 연주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오지철 재단 회장은 “이 오케스트라는 발달장애인이 음악을 통해 얼마든지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전 세계에 전달하는 메신저”라며 “누구든 그들이 기울여온 노력과 인내, 협동의 정신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트하트재단은 1988년 설립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을 벌여왔다. 특히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를 키워낸 공로로 2011년 문체부 장관상, 2022년 삼성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